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노모리 쇼타로 (문단 편집) == 생애 ==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5ViBA6ei5U|유튜브]] [[파일:external/www.ishinomori.co.jp/timeline_1950.jpg]] [youtube(Un2WoxQTgtA)]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9살 때 [[데즈카 오사무]]의 <신 보물섬>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만화를 그리게 된다. 중학생 때 친구들을 모아 만화 [[동인지]]를 만들기도 했으나 2호로 폐간했다. 중2때는 <마이니치 중학 신문>에 4컷 만화를 응모해서 입선,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월간 잡지 <만화 소년>의 독자 투고란에 투고하던 동료를 모아 '동일본 만화 연구회'라는 모임([[아카츠카 후지오]]와 [[치바 테츠야]] 등이 회원으로 소속) 을 만들어 육필 회람 동인지 '먹물 한 방울'을 만들었고 이것을 출판사에게 읽어보라고 돌렸는데, 이것은 당대 최고 인기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도 읽어보고 칭찬했고 [[미야기현]] 내에 천재가 있다는 소문이 났다. 그런데 정작 어릴 적의 꿈은 '''영화 감독'''. 그 꿈은 [[가면라이더(초대)|가면라이더]] 84화로 이루었다. 이후 [[이나즈맨]] 11화, [[가면라이더 스트롱거]] 최종화 같은 것도 감독했다. 이후 현립 사누마고등학교 2학년 때(1954년 5월)는 그를 주목한 데즈카 오사무가 전보를 보내 [[철완 아톰]]의 원고 에피소드 1화분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런데 조수는 배경이라든가 먹물칠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쇼타로는 데즈카 오사무가 부재한 상황에서 그가 초안을 잡아놓은 원고를 보고는 데즈카 오사무의 그림체를 그대로 흉내내서 캐릭터까지 그려서 원고를 완성해 버렸다. 이것을 나중에 온 데즈카가 알게된 후 그 원고는 폐기하고 다시 그린 일화가 있다. 그 원고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같은 해 데즈카의 소개로 옴니버스 단편 연재작 <2급 천사>를 월간 잡지에 연재, 프로 만화가로 데뷔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봄, 부모님의 맹반대를 물리치고, 만화를 그려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서 대학교에 가겠다고 큰소리 치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세상사는 쉽지 않아서, 믿었던 연재처 월간잡지가 폐간을 해버려서 비좁은 자취방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원고 의뢰를 걱정하고, 가진 돈도 떨어져서 어머니와 누나가 보내 준 용돈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교육직 공무원이었던 고지식한 아버지는 아들이 만화를 그리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고, 그때마다 동생을 적극 지지해 준 이는 누나 '오노데라 요시에'였다. 세살 위였던 누나는 생애 지병인 [[천식]]으로 병약해서 외출도 못했고, 어릴 적 쇼타로가 그린 만화를 가장 처음으로 읽는 독자였고 조언을 해주는 조력자였다. 누나는 훗날 도쿄의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자취 생활을 하는 남동생을 돕기 위해 그가 살고 있던 [[토키와 장]]으로 왔다. 미인이었던 누나는 토키와 장의 '마돈나'같은 존재였다. [[후지코 후지오 A]]는 요시에를 처음 봤을 때의 놀랐던 경험을 회고하면서 "미인에 착하고 머리도 좋았다. 완벽한 사람. 토키와 장의 멤버 모두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차마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이시노모리 [* 못 생겼다고 토키와 장에서 그를 부르는 별명이 '감자'였다고 한다. 다만 어릴 때는 누나와 얼굴이 비슷했다. 그런데 만화에 집중하면서 외모 관리를 안하다보니 볼품없어진 것.]와 전혀 안 닮아서 놀랐다." 라고 하기도 했다. 드라마 '히어로를 만든 남자 이시노모리 쇼타로 이야기'에서는 여배우 [[키무라 후미노]]가 요시에 역을 연기했는데 요시에와 얼굴이 매우 닮아서 화제가 되었다. 미모가 연예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지인들에게 [[시스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인정할 정도로 누나를 깊이 신뢰하고 따랐다고 한다. 이시노모리는 누나가 죽기 전에 토키와 장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을 해서 "병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지 왜 연애를 생각하고 있어!" 하고 화를 내고 질투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인들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은 아마도 [[후지코 후지오 A]]일 것 같다고 한다. 이시노모리도 누나가 누구인지 말은 안 했지만 "후지코 후지오 A구나." 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후지코 후지오 A도 어렴풋이 혹시나 하는 생각은 했는데 그때 자신이 좋아하던 건 다른 사람이라 요시에와 연애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https://megalodon.jp/2012-1025-1310-09/mizumakura.exblog.jp/10953730/|#]] 안타깝게도 요시에는 상경한지 1년도 채 못 가 갑자기 하루 만에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1958년 4월 4일에 사망했다. 천식 발작이 심해서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의사는 안정을 시킨다고 [[모르핀]]을 주사해놓고 "가만히 있으면 나을 것이다." 라고 방치했는데 모르핀 부작용으로 인한 심장 쇼크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날 이시노모리를 누나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 기분 전환을 위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왔는데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의료 사고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의사를 원망하기 보단 누나를 방치하고 영화를 보러 간 자신에게 더 큰 화가 났다고 한다. 이시노모리는 말년까지도 누나 생각만 하면 "내가 그때 누나 옆에 있었더라면..." 이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여하튼 1956년 5월 4일 토기와 장에서 먼저 살고 있던 테라다 히로오의 권유로 친구인 [[아카츠카 후지오]]와 함께 [[토키와 장]]의 방 한 칸으로 입주하여 소녀 잡지에 몇 편의 단편을 게재하면서 본격적인 프로 만화가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만화 전문 잡지도 거의 없었고, 여성 만화가도 거의 없던 시기로 순정 만화도 남성 만화가가 그렸다. 그 내용도 주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신파]]조의 이야기가 주류였다. 쇼타로는 자신은 그런 순정 만화를 그릴 줄 모른다며 [[셜록 홈즈 시리즈]]의 '[[얼룩 띠의 비밀|얼룩끈]]'이라든가, SF, 개그 등의 소재를 순정 만화 스타일로 그려서 게재했다. 당시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그림 솜씨와 스토리텔링으로 곧 인기 만화가가 되었다. 토키와 장 멤버들에서는 가장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어 [[아카츠카 후지오]]는 자기 만화를 그리는 시간보다 이시노모리의 작업을 돕는 시간이 많았었고, 작화 속도도 다른 만화가들을 압도한 수준이어서 훗날 [[후지코 후지오]]와 [[나가이 고]] 등이 자신의 만화에서 그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후지코 후지오 A]]의 <만화의 길>에서는 그들이 하루에 5, 6장씩 그렸을 때 이시노모리가 혼자서 15-20장을 그린 일화를 언급했다. 1959년에는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 동화]]는 [[데즈카 오사무]]의 '나의 손오공'이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장편 만화영화 <서유기>를 제작하기로 했고, 데즈카는 시나리오와 설정 자료 등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의뢰받은 만화 원고가 너무 많아 직접 찾아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제자였던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츠키오카 사다오]]를 보내 영화 제작을 도와 주도록 했다. 이때 애니메이션에 매력을 느껴 토에이 동화에 입사해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당시 토에이 동화의 스텝이었던 시라카와 다이사쿠가 이시노모리의 그림체는 개성이 강해서 애니메이터로는 맞지 않는다며, 만화가로 성공하면 그 원작을 우리가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수긍하고 포기했다. 이런 인연이 계기로 훗날 인기 만화가가 된 이시노모리의 작품은 토에이에 의해 차례차례 영상화되었다. 한편, 집안이 극장을 운영하던 [[츠키오카 사다오]]는 어릴 적부터 디즈니의 영사기 필름을 직접 보면서 자라서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고, 애니메이터로서의 재능을 사서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스카웃했고,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첫번째 [[TVA]] [[늑대소년 켄]]을 원화를 거의 혼자서 그리고 연출을 하고, 나중에는 독립해서 광고나 예술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가 된다. 누나의 죽음으로 [[우울증]] 비슷한 증상을 가지게 된 그는 기분전환도 할 겸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다. 출판사에게 미리 원고료를 땡겨받는 형식으로 여행 자금을 조달하고, 출판사의 취재 기자 신분으로 탐사보도를 한다는 식으로 비자를 얻어서 당시로서는 해외 여행이 힘들던 시절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이 여행 중에 우연히 보게 된 잡지 [[라이프(잡지)|LIFE]]의 기사에서 [[사이보그]]라는 낱말을 알게 되고, 세계 일주 체험에서 여러 국적의 인물을 등장시킨 [[사이보그 009]]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1964년 7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사이보그 009]]는 그의 대표 인기작이자 인생작이 되었다. 1965년 그가 쓴 '만화가 입문'과 후속작 '속 · 만화가 입문' 등은 세부적인 만화 기술론에서 부터 스토리 구상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작성된 당시엔 무척 획기적인 만화가 입문서로 수 년간 만화가 지망생들한테 바이블 역할을 했다. 특히 단편 <[[용신늪]]>은 잡지에 게재한 원고를 다시 싣고 직접 해설을 달았는데, 그 뛰어난 연출은 이 만화를 읽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는 유명 여성 만화가([[타케미야 케이코]] 등)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만화가가 많다([[하기오 모토]] 등).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데즈카 오사무가 창간한 만화 잡지 COM에 연재한 옴니버스 단편 연재작 《쥰, 환타지 월드》는 대사가 거의 없고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다양한 그림만으로 표현해서 일본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연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치바 테츠야]]는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라며, 이 작품의 영향으로 만화에 계절 묘사과 생활 감각을 의식해서 그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1971년엔 [[가면라이더]]의 원작 만화를 그렸으며, 프로그램 기획 과정에 설정들과 캐릭터 디자인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가면라이더의 성공을 계기로 토에이 특촬들의 원작을 맡기도 했다.[* 실사 프로그램에서 출연한 게스트 캐릭터 디자인의 대부분은 이시노모리가 간단한 설정을 구상해 밑그림을 그려, 그 러프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진들이 시나리오와 인형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1981년엔 일본 만화가 협회의 이사를 맡았으며, 4년 뒤 만화가 데뷔 30주년을 계기로 이름을 지금의 이시노모리 쇼타로로 개명했다. 1998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심장마비, 1992년에 [[림프종]] 진단을 받아 일을 쉬었고, 60번째 생일을 맞은지 정확히 3일 후였다. 장남은 [[울트라맨 다이나]]의 [[나카지마 츠토무]] 역으로 유명한 배우 오노데라 죠,[* 이시노모리 본인은 이 울트라맨 다이나가 방영되던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차남은 현 이시모리 프로 대표인 오노데라 쇼, 차손은 어린 시절의 [[아마츠 가이]] 역을 맡은 오노데라 세이루이다. 2018년 8월 25일에 니혼TV에서 그의 일생과 [[가면라이더]]의 탄생을 그리게 되는 '''이시노모리 쇼타로 이야기'''[[http://www.pandora.tv/view/dksll/56303159/#38713594_new|#]]가 방영되었다. 이시노모리 쇼타로 역은 [[나카지마 켄토]], [[아카츠카 후지오]] 역은 [[하야시 켄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